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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habb 2019. 5. 2. 23:02
그는 그녀를 피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온 세상이 백야로 가득차 눈이 시렸던 때 밖을 오래도록 보던 그 뒷모습을 기억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살짝 더 굽은 등과 올바르지 못하게 옆으로 기우뚱한 고개를 기억한다. 그는 여느 북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어느 보통 사람보다 키가 컸다. 볼은 홀쭉 패였으며 찬 바람을 많이 맞아 살이 퍼석퍼석했다. 그녀의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나이들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파란 많은 그녀의 삶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손엔 주름이 가득했다. 퍼석퍼석하고 주름 많은 손등이었다. 그녀는 설원에서 태어났으나 사막의 모래를 닮았다.


그녀는 자주 그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는 어른이 된 때까지도 그것이 마음의 위안이 된 적 많았으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서로를 끌어안을 때에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그의 어미가 사랑한다 말할 때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그가 그의 어미와 작별한 것은 일곱 살의 일이나 어쩌면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와의 이별을 준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을 말할 때의 눈빛을 오랫동안 감춰 왔으므로.


그는 그렇게 자랐다, 사랑에 대한 여지 없이.


남자는 기민했다. 고양이가 오고 가는 기척을 느낄 수 있고, 눈이 쌓일 때의 느낌을 알았다. 사람이 분노할 때의 어투가 어떤지, 평온할 때는 또 어떠한지에 대해 빠르게 익혔고 습득했다. 사람을 대할 때 입꼬리엔 잔잔한 미소 같은 것을 띄고 있었고 상황에 따라 호탕하게 웃을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분했다. 눈꼬리는 늘 부드럽게 휘어 있었고 때로는 코까지 찡그리며 웃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그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똑똑했고 그것조차 잘 이용할 줄 알아서 더 똑똑해 보였다. 그는 그가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의아했지만 그러나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연기자였으므로 사랑 주는 척을 그럭저럭 잘했다. 사랑에 대한 여지 같은 것은 흉내낼 수 있었다. 그것보다 쉬운 것은 없었다.


욱은 인생의 황혼기라 불리는 시기까지 그러한 인생을 살았다. 재미없는 생이 거듭해 그의 이마에 쌓였다. 하루의 많은 시간동안 공부하고 책을 읽고 몸을 움직이고 그가 키우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똥을 치웠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삶에 생채기를 내며 스쳐 지나가곤 했으나 그건 아주 일시적인 일이었고 그의 인생에 어떠한 사건이랄 것도 되지 못했다. 그는 생채기가 스스로 치유되도록 그대로 두었으며 상처는 흉터 하나 남지 않고 없어졌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들이 그랬다. 그는 정적인 인간이었다. 정물화 속의 흰 탁자에 놓인 사과처럼 영영 썩지 않는 인생.

남자는 그렇게 영영 외로이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그가 보는 모든 풍경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안개가 끼듯, 물에 우유를 부은 듯.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이는 것처럼 잘 말했다. 그는 여전히 기억력이 좋고 설명에 능했으므로. 책상이 있었던 곳을 기억하여 어제는 그 위에 컵받침을 놓고 차를 마셨다고도 말했고, 몇 달 전까지는 문을 여닫을 때 끼익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 난다며 기름칠을 해야겠다고도 말했다.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칭하며 아직도 정정하시다고 허허 웃었다. 그는 시야의 우윳빛이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검은 암흑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서 무섭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부모도, 아이도, 배우자도 없었고 심지어는 제자 또한 두지 않았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잡지 않았다. 혹자는 그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정착하지 못했다 평했지만 그의 인생은 사실 시간에 안착하여 시간에 따라 흘러가길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시간에 순응하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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